90%의 남자가 '강함'이라고 착각하는 것
이 글의 목차
왜 어떤 남자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남자답다'고 느껴지는가?
90%의 남자가 '강함'이라고 착각하는 것
운의 역설 → 프레임의 역설에 이어 남성성의 역설, 이 시리즈의 3편입니다.
책임반경이라는 하나의 상위 원리로 묶어서 풀어내보겠습니다.
물론 남성성에 있어서 설명할 것들은 너무나도 많지만
회복탄력성
자기효능감
리스크 감내력
의사결정력
사회적 지위
여성성/남성성의 상호작용
이 칼럼을 통해 하나의 패러다임을 남기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운의 역설 — 실력은 운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운에 맡겨야 할 영역을 줄이는 것이다.
프레임의 역설 — 상대를 통제하는 능력이 아니라 내가 통제해야 할 영역을 줄이는 능력
남성성의 역설 — 남성성은 세상을 내 뜻대로 만드는 힘이 아니라,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세상까지 감당할 수 있는 힘
현실을 내 뜻대로 만들려 하지 않는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현실을 넓힌다.
남성성 = 책임반경
끝까지 읽으면 당신이 얻게 될 이득
여자가 본능적으로 '믿을 만한 남자'와 '불안한 남자'를 구분하는 결정적인 차이를 알게 됩니다.
연애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여자를 통제할지, 기다릴지, 직접 결정할지 고민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얻게 됩니다.
강한 척하지 않아도 여자가 자연스럽게 의지하고 존중하게 되는 남자의 핵심 '책임반경'을 이해하게 됩니다.
오늘 글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남자답다'라는 말을 앞으로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하게 될 겁니다.
매력적인 남자가 되기 위해 수많은 남자들을 위하여, 거듭남에 조금 보탬이 되기 위해 몇 자 적어 보겠습니다.
<남성성의 역설>
강한 남자가 되려고 애쓸수록, 오히려 약함이 드러나는 이유
남자는 강해야 한다. 남자는 주도해야 한다. 남자는 기죽으면 안 된다. 남자는 여자에게 끌려다니면 안 된다.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겁니다. 그래서 많은 남자들이 강한 남자가 되려고 합니다.
목소리를 낮게 깔고 가오를 잡는다던지, 좋아하면 지는 거다, 빠른 호감 선언은 니디해지는 거다 라고 생각하며 감정을 숨기고 억압합니다.
절대 먼저 숙이지 않습니다. 여자에게 져주는 건 남자로서 쪽팔린 일이다, 여자를 지배하고 내 마음대로 여자의 순응도를 높혀야 지배력이다.
일부러 아쉬움 없는 척하면서, 잘 보이려는 모습과 멋있는 모습을 점철된 모습만 연출합니다. 자기 말을 상대가 듣게 만들려고 합니다. 자기 주장이 옳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심리도 있고요. 여자에게 조금이라도 밀리는 순간 자신의 남성성이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굉장히 이상한 모순이 하나 있습니다.
정말 강한 사람이라면 왜 자신의 강함을 계속 타인의 반응으로 확인해야 할까요?
여자가 내 말을 들으면 강한 남자, 거절하면 약한 남자.
존경하면 강한 남자, 무시하면 약한 남자.
여자가 스킨십을 빼지 않으면 강한 남자, 빼거나 거부하면 약한 남자.
이렇게 된다면 내 남성성을 결정하는 사람은 내가 아닙니다. 여자입니다.
남자다움을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반응이 필요하다는 것. 저는 이것이 강함과는 오히려 완전 반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성성을 잘못 배우면 조금 잔인한 일이 생깁니다.
강해지기 위해 하는 행동이 오히려 내가 약하다는 사실을 더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그 남자의 모든 행동의 출발점에 "내가 약한 남자로 보이면 어떡하지?"라는 공포가 있다면 어떨까요?
심지어 슈내 회원 중에 몇 분은 자신이 남성성이 거세당했고, 거세 공포증이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우울증으로 고생하시는 회원님, 조울증으로 고생하시는 회원님 등등
다들 강인한 남자가 되고 싶다고 하면서 강한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타인의 평가가 사라지는 순간 자기 강함도 유지하지 못합니다. 저는 그걸 남성성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 글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남자답다'라는 말을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여자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보다 먼저 "나는 얼마나 큰 현실까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알게 되실 겁니다.
저는 거기에 남성성의 본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를 지금까지 지켜봐오신 회원님들은 감사하게도 저를 남자 중에 남자다, 이렇게 멋있는 남자는 처음이다, 닮고 싶은 남자의 끝판왕이다 라고 불러주시기도 하지만, 과연 그런 남자가 되려면 여러분에게 그렇게 보이기까지 어떤 과정을 겪었고 뭘 어떻게 해야 그런 남자가 되서 여자에게 무한한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사회적으로 제가 멋있는 남자인가? 정말 모든 사람이 보기에도 멋있고 매력적인 남자인가? 그건 아닐 겁니다. 그런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내가 만나는 여성에게만큼은 최고의 남자다'라는 평가는 절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여자에게 존경받는 남자라는 관점에서는
제가 정답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남자다움의 방식을 여러분이 계승하시면 자신이 만나는 여자에게만큼은 '최고의 남자'가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여자친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오빠의 의식수준을 제대로 전이받는다면 그 회원분이 만나는 여자친구는 엄청 행복할 거야, 내가 늘 그런걸'
남성성은 '지배력'이 아니라 책임반경이다
남성성 이야기를 하면 자주 등장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책임, 문제해결, 리더십, 보호.
올바른 남성성을 이 네 가지 축으로 설명합니다. 저도 방향에는 동의합니다.
다만 이 네 개를 각각 외우면 중요한 본질 하나를 놓치기 쉽습니다. 저는 이것들을 하나의 개념으로 묶고 싶습니다.
책임반경.
책임반경은 슈내에서 제가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단순히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세요"라는 뜻이 아닙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상하지 못한 현실이 내 계획 안으로 침범했을 때, 어디까지를 남 탓으로 밀어내지 않고 내가 처리할 문제로 받아낼 수 있는가. 그 범위입니다.
돈적인 부분이 꼬여서 힘들어졌습니다.
어떤 계획을 세우고 일을 진행하는데 계획이 틀어졌습니다.
그 사람과 굉장히 친밀하게 지냈는데 배신을 당하거나 사람이 떠났습니다.
실수하려고 한 건 아니지만 그게 의식적이든 아니든 간에 내가 실수했습니다.
내가 상대한테 기대한 바가 있고 이 정도는 해줄 줄 알았는데 내 마음 같지 않고 상대가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나의 문제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사람에 의해서, 가족에 의해서, 친구에 의해서 갑자기 문제가 생겼습니다.
책임반경이 좁은 사람은 현실이 자신의 예상에서 벗어나는 순간 원인을 밖으로 밀어냅니다.
누구 때문이지?
왜 나한테 이러지?
쟤가 이상한 거 아냐?
운이 없었네.
상황이 별로였네.
반대로 책임반경이 넓은 사람은 잘못의 소재를 보기 전에 이성적으로 스스로에게 다른 질문을 던져봅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처리할 수 있는 건 뭐지?"
이 차이가 앞으로의 어마어마한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단순한 질문 하나가 그렇게 왜 파급력이 있는지, 제가 생각하는 강한 사람은 문제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는 똑같이 계속 생겨납니다. 우리가 군대에서 매일매일 오전 일과를 나가서 똑같은 걸 하는데 전역할 때까지 할 일이 있는 것처럼요.
이 차이는 문제가 그 사람에게 도착한 이후에 있습니다.
강한 사람은 문제가 적은 사람이 아니라 문제가 자기에게 도착했을 때 확대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게 책임반경입니다.
약한 사람은 '문제'를 전달하고 강한 사람은 '처리된 문제'를 전달한다
이상형의 여자랑 데이트를 하러 갔습니다. 그녀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고 분위기 좋은 데도 가보고 싶어서 식당을 예약해뒀습니다. 그런데 예약해둔 식당이 갑자기 문을 닫았습니다.
한 남자는 말합니다. "아, 씨. 여기 왜 닫았지?"
휴대폰을 봅니다. 당황합니다. 그러고 여자에게 묻습니다. "어디 갈래?"
문제는 하나였는데 이제 불안까지 두 사람의 것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다른 남자는 말합니다. "여기 닫았네." 잠깐 보고 "근처에 괜찮은 곳 하나 있어. 거기로 가자."
아주 사소한 대처입니다. 굉장한 행동이 아닙니다. 돈이 많아야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상대가 경험하는 것은 큽니다.
문제가 생겼는데 이 사람 옆에서는 문제가 커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리됩니다. 저는 이것이 리더십의 가장 작은 단위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이 리더십을 "사람들이 내 말을 듣게 만드는 힘"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지시하고, 결정하고, 주도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봅니다.
리더십은 사람들이 내 말을 듣게 만드는 힘이 아니라 문제가 생겼을 때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게 되는 이유입니다.
왜 그 사람을 쳐다볼까요?
저 사람은 당황하지 않으니까.
저 사람은 결정할 수 있으니까.
저 사람은 결과를 떠넘기지 않으니까.
저 사람에게 가져가면 문제가 조금 더 정리된 형태로 돌아오니까.
그래서입니다.
회사에서도 똑같습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 사람은 상사에게 가서 말합니다. "큰일 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불안을 그대로 위로 전달합니다.
다른 사람은 말합니다. "이 문제가 생겼습니다. 원인은 이것 같고 지금 가능한 선택지는 두 개입니다. 제 판단으로는 두 번째가 가장 낫습니다."
둘 중 누구에게 더 큰 일을 맡기고 싶을까요?
결국 사람들은 현실을 받아서 더 나쁜 상태로 전달하는 사람보다 현실을 받아서 처리 가능한 형태로 바꾸는 사람을 신뢰합니다.
책임반경이 좁은 사람은 문제를 전가합니다. 짜증, 탓, 불안, 회피, 의존.
책임반경이 넓은 사람은 문제를 흡수합니다. 그리고 처리해서 내보냅니다.
여기서부터 책임감, 문제해결력, 리더십, 보호가 사실상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다는 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보호와 통제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남성성을 이야기하면서 가장 많이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보호'입니다.
여자친구가 늦게 들어갑니다. 불안합니다. "거기 가지 마." 남자가 있는 자리라고 합니다. 불안합니다. "가지 마." 연락이 조금 늦습니다. "계속 연락해."
본인은 이것을 보호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관계마다 합의할 수 있는 기준은 다릅니다.
문제는 행동보다 그 행동이 어디에서 나오느냐입니다.
보호와 통제는 얼핏 비슷해 보입니다. 둘 다 위험을 줄이려고 하니까요. 그런데 방향은 정확히 반대입니다.
통제는 상대의 행동 가능성을 줄여 내가 겪을 불확실성을 줄입니다.
반대로
보호는 내 대응 가능성을 늘려 불확실성을 감당합니다.
이 차이를 잘 봐야 합니다.
보호할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세상을 자기 능력에 맞게 작게 만들어야 합니다. 가지 마. 하지 마. 만나지 마. 위험한 상황을 전부 없애야 자기가 안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여자들의 특성입니다.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니까 불확실성을 줄이려는 생각이죠.
반대로 대응할 능력이 커질수록 모든 것을 통제할 필요가 줄어듭니다. 상대에게도 더 많은 자유를 줄 수 있습니다.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그 상황에서 판단하고 대응할 자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성성에는 이런 역설이 생깁니다.
보호력이 약할수록 상대의 자유를 더 많이 통제해야 할 수 있습니다. 보호력이 강해질수록 상대를 통제할 이유는 줄어듭니다.
이건 앞서 이야기했던 프레임의 역설과도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통제해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은 항상 강함의 증거가 아닙니다. 때로는 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현실이 많다는 증거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남성성이 커지는 과정을 이렇게 보고 싶습니다.
남성성이 커진다는 것은 세상을 더 많이 통제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통제하지 않아도 감당할 수 있는 세상이 점점 넓어지는 것입니다.
결정권을 원한다면 '책임비용'도 가져가야 한다
남자들은 흔히 주도권을 원합니다. 내가 결정하고 싶습니다. 내가 방향을 정하고 싶습니다. 상대가 내 판단을 믿어줬으면 좋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반드시 하나가 따라와야 합니다. 결과입니다.
데이트 장소는 내가 정했습니다. 별로였습니다. "아, 너도 여기 좋다며."
사업 방향은 내가 정했습니다. 실패했습니다. "시장 상황이 이상했어."
관계를 내가 주도했습니다. 헤어졌습니다. "여자가 이상했어."
이건 리더십이 아닙니다. 권한은 내가 가져가고 실패의 대가는 밖으로 외주화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리더십에 아주 단순한 원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정권과 책임비용은 같이 움직여야 합니다.
내가 더 많은 결정권을 원한다면 그 결정에서 발생하는 불확실성 역시 더 많이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이쪽으로 가자고 했으니까 문제가 생기면 내가 처리할게."
이게 가능해지는 순간 사람들은 이상하게 그 사람의 결정을 더 쉽게 따릅니다. 그 사람이 목소리를 크게 냈기 때문이 아닙니다. 결과까지 가져갈 사람이라는 신뢰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권위는 요구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책임질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질수록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경우가 많습니다.
존중은 요구하는 순간보다 '나중에 따라오는 순간'에 더 가깝다
"날 좀 존중해줘." "내가 남자인데 이 정도는 따라줘야지." "내가 상사니까 존중해."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존중에는 재미있는 특성이 있습니다. 직접 요구한다고 생기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도망가지 않은 것.
내 잘못의 비용을 지불한 것.
남들이 외면한 책임을 가져간 것.
자기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지 않은 것.
해야 할 말을 피하지 않은 것.
중요한 순간에 결정을 내린 것.
그런 경험이 쌓인 뒤에 상대가 느끼는 감정에 나중에 붙는 이름이 존중인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이걸 '존중의 후행성'이라고 부릅니다.
존중받으려고 행동하는 사람은 계속 존중을 상대에게 확인합니다. "나 존중하지?" "내 말을 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반대로 자기 책임을 계속 감당하는 사람은 어느 순간 존중이 이미 따라와 있다는 걸 발견합니다.
그래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존중받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존중받을 만한 선택을 반복해야 합니다.
존중은 목표라기보다 결과에 가깝습니다.
남성성을 증명하려는 순간 남성성은 '타인의 평가'가 된다
남성성을 공부한 남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모든 행동을 "이게 남자다운가?" "알파다운가?" "내가 지금 약해 보이나?"라는 기준으로 검열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먼저 사과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내가 먼저 사과하면 을인가?"를 생각합니다.
여자에게 잘해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호구처럼 보이지 않을까?"가 먼저 떠오릅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약해 보일까 봐" 도움을 못 청합니다.
속으로는 불안한데 강한 남자는 흔들리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계속 무표정을 연기합니다.
이 상태는 남성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남성성'이라는 관객 앞에서 평생 오디션을 보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내 행동의 기준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아니라 "강한 남자로 보일까?"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정말 자기 기준이 있는 사람은 사과해야 하면 사과합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합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도움을 구합니다.
두려우면 자기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도 압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그래서 지금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강함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두려움 이후에도 선택권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감정이 없는 남자가 강한 게 아니다
남성성을 잘못 배우면 감정을 없애려고 합니다. 슬퍼도 아무렇지 않은 척. 질투가 나도 아무렇지 않은 척. 불안해도 아무렇지 않은 척.
그런데 감정을 숨긴다고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통로로 나올 수 있습니다. 통제, 분노, 냉소, 집착, 회피, 상대를 벌주는 행동.
그래서 저는 내 감정 역시 책임반경 안에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안한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내가 불안하다는 이유로 상대가 반드시 행동을 바꿔야 하는가?
질투가 납니다. 그런데 내 질투를 처리하기 위해 상대의 자유를 전부 줄여야 하는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상대를 똑같이 상처 입혀야 내 감정이 해결되는가?
책임반경이 넓어진다는 것은 세상 문제만 해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 일어난 일까지 무조건 밖으로 떠넘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감정을 느낍니다. 인정합니다. 필요하면 대화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행동은 그 감정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방향에 맞게 선택합니다.
감정을 없애는 것은 강함이 아닙니다. 감정의 존재와 행동의 결정권을 분리할 수 있는 것이 강함입니다.
이 단계부터 남성성은 보여주는 퍼포먼스가 아니라 내적인 구조가 됩니다.
그런데 책임반경은 '나는 강하다'고 외친다고 넓어지지 않는다
여기까지 읽으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알겠다." "이제부터 책임지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나는 강한 남자다."
그런데 보통 이런 생각은 며칠 못 갑니다. 왜일까요?
사람은 자기가 되고 싶은 모습을 그대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기가 반복해서 목격한 자기 모습을 믿습니다.' 자신이 반복해서 목격한 모습은 당연히 남자답지 못한 자신의 추함이겠죠.
원문 역시 마지막에는 결국 남성성이 정체성, 즉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믿고 행동하는가의 문제로 수렴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부분을 조금 다르게 보고 싶습니다.
"나는 책임감 있는 남자다." 라고 백 번 말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50번의 문제에서 도망쳤습니다. 핑계를 댔습니다. 약속을 어겼습니다. 남 탓을 했습니다.
내 무의식은 이미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습니다. 말로는 속이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하기 싫었는데 약속을 지킨 경험.
잘못했는데 핑계 대지 않은 경험.
무서웠는데도 필요한 말을 한 경험.
문제가 생겼는데 끝까지 처리한 경험.
내 선택이 실패했는데 그 비용까지 내가 낸 경험.
하나하나는 작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계속 쌓이면 어느 순간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와 인식이 바뀝니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도 결국 이걸 회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해결하고 처리하려고 하는 사람이구나."
그때부터 행동이 조금씩 바뀝니다.
그래서 저는 정체성을 자기암시보다는 자기증거의 누적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되고 싶은 사람을 믿기보다 지금까지 내가 보여준 증거가 말하는 사람을 믿습니다.
그래서 자신감 역시 생각만으로 만드는 감정보다 내가 나 자신에게 "너를 믿어도 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증거가 쌓이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자신감은 생각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믿어도 된다는 증거가 쌓이며 생긴다
이건 연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 앞에서 "나는 당당하다." "나는 알파다." "나는 가치가 높다." 라고 암시하는 것보다
약속을 지키고, 자기 일을 해내고, 어려운 일을 피하지 않고, 거절을 경험하고도 다시 움직이고,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무너지지 않고, 필요하면 혼자서도 자기 삶을 계속 굴리는 경험.
그런 경험들이 훨씬 강한 정체성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경험이 충분히 쌓이면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감 있게 행동해야지." 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행동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런 상황에서 결국 처리하는 사람이라는 자기증거가 이미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책임반경이 넓어질수록 남성성은 '느낌'이 된다
여기까지 오면 처음 질문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왜 어떤 남자는 큰소리를 치지 않아도, 여자를 찍어누르지 않아도, 강한 척하지 않아도 이상하게 "남자답다." "든든하다." "저 사람은 믿을 만하다." 는 느낌을 줄까요?
어쩌면 이유는 굉장히 단순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더 많은 현실을 받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감정을 감당합니다. 내 선택을 감당합니다. 내 실패를 감당합니다. 내 돈의 문제를 감당합니다. 내 관계의 문제를 감당합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를 감당합니다.
때로는 내 주변 사람에게 생긴 문제까지 받아낼 수 있습니다.
그 반경이 점점 커집니다. 그리고 책임반경이 커질수록 굳이 사람들에게 "나는 강한 사람이야."라고 설명해야 할 이유가 줄어듭니다.
주변 사람들이 이미 그것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이 사람은 도망가지 않는다.
감정이 올라와도 모든 것을 망가뜨리지 않는다.
자기 결정의 결과를 남 탓으로 넘기지 않는다.
필요하면 결정한다.
필요하면 보호한다.
잘못하면 인정한다. 그리고 다시 움직인다.
그런 경험이 계속 쌓입니다. 그러면 남성성은 더 이상 내가 주장해야 하는 정체성이 아닙니다. 주변 사람들이 이미 느끼고 있는 결과가 됩니다.
그게 사람들이 저한테 진짜 남자 중에 남자라고 느끼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남성성의 크기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현실의 크기'다
남자다움이란 무엇일까요?
돈을 얼마나 버느냐. 몸이 얼마나 좋으냐. 여자를 몇 명 만났느냐. 목소리가 얼마나 낮으냐. 얼마나 센 말을 하느냐.
이런 요소들이 상황에 따라 의미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기준으로 얘기하겠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큰 현실까지 자기 중심을 잃지 않고 처리할 수 있는가.
내 감정. 내 일. 내 돈. 내 선택. 내 관계. 내 실패. 내가 지켜야 할 사람.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
그 범위가 넓어질수록 책임반경도 넓어집니다.
그리고 저는 그 책임반경의 크기가 남성성의 크기와 상당히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남성성의 역설>이 완성된다
약한 사람은 자기가 감당하지 못하는 현실을 줄이려고 합니다.
사람이 내 뜻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 없어야 합니다. 상대가 나를 계속 안심시켜줘야 합니다. 실패하면 안 됩니다. 거절당하면 안 됩니다. 관계가 흔들리면 안 됩니다.
그래야 자기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강해 보이기 위해 세상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강한 사람은 현실을 자기 크기에 맞게 줄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키웁니다.
감당할 수 있는 실패가 늘어납니다. 받아낼 수 있는 불확실성이 늘어납니다. 책임질 수 있는 선택이 늘어납니다. 감당할 수 있는 감정이 늘어납니다.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그리고 그 반경이 넓어질수록 다른 사람을 통제해서 강함을 증명할 이유는 줄어듭니다.
이미 그 사람이 감당하고 있는 현실의 크기가 그 사람의 강함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남성성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남성성은 지배력이 아닙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현실의 반경입니다.
상대의 자유를 빼앗아 내 불안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자유를 주고도 그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불확실성을 감당하는 것.
결정권을 원하면서 실패의 대가는 남에게 넘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방향의 결과까지 가져가는 것.
존중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받을 만한 선택을 반복하고 존중은 결과로 남겨두는 것.
두려움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해야 할 행동을 선택하는 것.
처음에는 내 감정을 책임집니다. 그다음에는 내 선택을 책임집니다. 조금 더 올라가면 내 주변의 문제까지 처리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반경이 넓어질수록 사람들은 이상하게 그 사람을 믿기 시작합니다.
여자도, 친구도, 동료도, 가족도.
그 사람이 자신들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현실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리더로 추대받게 됩니다. 그런 책임반경이 넓어져야 리더십이 좋아집니다.
리더 역할을 해보지 않은 사람에게 '리더십을 보여줘라'라고 해봤자 보여줄 수 없습니다. 삶에서 그런 삶의 양식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가장 높은 남성성은 세상을 내 뜻대로 만드는 힘이 아닙니다.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세상까지 받아낼 수 있는 힘입니다.
강한 남자가 되려고 애쓸 때는 타인을 움직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강해질수록 움직여야 하는 대상은 타인이 아니게 됩니다.
자기 자신입니다.
세상을 줄이는 게 아니라 내가 커집니다. 불확실성을 없애는 게 아니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불확실성을 늘립니다. 상대를 통제하는 게 아니라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선택을 늘립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강함을 증명할 필요 자체가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세계를 어제보다 조금 더 넓혀가는 것.
그게 제가 생각하는 진짜 남성성이고, <남성성의 역설>입니다.
'당신은 어떤 남자가 되고 싶으신가요?'
이 제이콥한조의 길을 걷고 진정한 남자로 거듭나실 분들이라면 자신을 믿고 행하고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럼 세상에서 '도전자'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겁니다.